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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민족의 수난 - 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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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현석 댓글 0건 조회 1,518회 작성일 2014-12-1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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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 유다인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길을 선택할 기회가 그들의 앞에 주어져 있었다. '예수님의 길' 과 '바라빠의 길' 이 그것이었다. 허나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바라빠의 길' 을 택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메시아' 의 상(狀)과 조금이나마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로마에 대한 거부와 투쟁, 반발과 싸움!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그 길의 목적지가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들의 눈 앞에 실증(實證)으로 보여지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도, 오랜 세월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신교를 믿고 있던 로마제국의 종교정책에 반발하고, 동화되기를 거부하던 유다인들은, 로마에 대한 대규모 무장 봉기를 준비했다. 그것이 마침내 표면으로 터져 나온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지 불과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AD 66년에 발발한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이었다. 유다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무기를 들고, 거대한 로마 제국과 본격적으로 맞서 결사항전하기 시작한 이 전쟁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듯 했다. 숫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 로마의 수비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모두 학살당했으며, 그 해에는 로마 세력을 유다 지방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허나 로마제국이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리 없었다. 로마는 곧바로 유다 지방에 대규모의 진압군을 파견했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로마군과, 소수 민족인 유다인끼리의 전면전은 이미 그 미래가 실로 운명보다도 더 뻔한 일이었다. 유다인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잘 훈련된 로마군의 공략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그들의 앞에 천상의 군대가 나타나는 등의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파죽지세로 진격해 들어온 로마군은 예루살렘마저 함락시켜 버린다. 예루살렘 성전도 이때 불태워졌으며, 유다 민족은 이후로 자신들의 터전을 잃고 사방으로 떠도는 운명에 이른다. 유다 민족의 본격적인 수난, '디아스포라' 의 서막이었다.


AD 135년, 유다인들의 성지이자 터전이었던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에 의하여 다시금 철저히 파괴되기에 이른다. 이번에는 '시몬 바르 코크바' 에 의하여 또다시 대규모의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바르 코크바는 아람어로 '별의 아들' 이라는 의미이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민수24:17)> 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유다인들은 바르 코크바를 진정한 메시아로 여기게 된다. 때때로 '제2차 유다-로마 전쟁' 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무장 봉기는, 짧은 시간 내에 유다 지방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번에도 로마가 이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로마는 즉각 진압에 나섰다. 언제나 그랬듯, 유다인들은 막강한 로마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도처에서 밀리며 패퇴하는 운명에 처한 유다인들은 수십곳의 요새에 각기 고립된 채 농성전을 벌이다 모두 학살당하였고, 예루살렘은 다시금 함락된다. 바르 코크바는 최후까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끝내 패배하고 자결하였고, 그를 따르던 부하들도 전멸하였다. 로마에 맞선 유다인들의 무장봉기는 무참히 진압되었고, 이후 유다인들에 대한 로마의 정책은 강경 일변도로 선회하기에 이른다. 유다 지방은 그 이름마저 '시리아-팔레스티나' 로 바뀌어 버렸고, 예루살렘은 다시금 철저히 파괴되고 불태워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게다가 도시의 이름조차 '아일리나 카피톨리나' 로 바뀌고, 그곳에는 더 이상 유다인들이 그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2천년간 이어질 유다인에 대한 모진 박해의 서막에 불과한 일이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디아스포라 이후, 로마제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유다인들은 도처에서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하게 된다. 로마인들의 눈에 유다인들은 그야말로 밉상 그 자체인 민족이었고, 다른 민족들보다 더욱 혹독한 탄압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던 AD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공인되기에 이른다. 여지껏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던 거대한 제국이, 내부에서 그 근본부터 바뀌어 마침내 거대한 복음화의 산실로 탈바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고 난 후, 로마는 유다인들을 그전까지보다 더 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한다.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데, 너희들은 왜 우리를 박해하느냐?' 라는 유다인들의 외침에, 로마는 '예수님께서 고통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바로 너희들 때문이잖아?' 라고 답했다. 이후 로마제국 내에서 유다인들에게는 '예수를 죽인 족속', '그리스도인들의 적', '가장 악질적인 민족' 이라는 꼬리표가 영원히 따라다니게 되었다. 물론 그 이름만큼이나, 로마는 유다인들을 실로 무자비하게 박해하였다. 광활한 로마제국 각지에서 유다인들은 검투사가 되어 죽고, 맹수의 밥이 되어 죽고, 수없이 피흘리며 죽어갔다. 실로 온 세상이 로마제국의 영토였고,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가나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로마의 영향권이었다.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피해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유다 민족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디아스포라 이후 유다인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하는 유럽은 모두 옛 로마제국의 영토였고, 로마의 문화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의 언어, 특히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등등은 본디, 로마제국의 언어였던 라틴어의 '사투리' 에서 분화, 발전한 것이다. 그들은 유럽의 어느 곳에서도, 현지 유럽인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문화적으로도 그랬고, 종교적으로도 그랬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국교였고, 따라서 그들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유럽인들도 모두 그리스도교를 믿었는데, 유다인들은 끝까지 그들만의 믿음인 유다교를 고수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자신들이 '사기꾼이자 신성모독' 으로 단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한 예수님을 그들이 믿을 수가 있었겠는가? 유럽인들은 유다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했다. 심지어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터전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철저히 유럽 사회와 격리된 지역에서만 살아야만 하였고, 유럽인들에게 혐오, 기피받는 직업인 고리대금업과 같은 특정 직업에만 종사할 수 있었다.


유럽 각지에서 미움받고 박해받던 유다인들은, 가혹한 주위 환경에 맞서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돈' 을 선택했다.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의 장사, 돈을 관리하는 능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돈이란, 망망대해에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방이 적이고, 자신들을 미워하는 이들 뿐인데, 거기에다 돈이 없어서 굶주리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 구현된 지옥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선택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미움과 박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의 어느 국가에서든, 한 줌도 되지 않는 유다인이 국내 총 소득의 수십%를 그야말로 독식하다시피 하는 모습이 유럽인들의 눈에는 결코 좋게 보일 리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문학 작품 '베니스의 상인' 은, 유럽인들의 그러한 시선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유다 민족의 수난은 그 절정에 이른다. 인류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수장 '아돌프 히틀러' 는, 모든 유다인을 영원히 지구상에서 박멸해 버리려는 시도를 단행했다. 나치스의 '유다인 말살 정책' 으로 인하여, 조상 중에 유다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이는 선조가 유다인이되 유럽식 교육을 받고, 유럽식 문화 속에서 자라, 자신이 유다인의 자손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던 어린 아이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나치 독일은 발달된 과학력으로, 유다인의 후손으로 의심되는 이들의 혈통과 가계도를 주도면밀하게 분석하여, 유다인 조상을 둔 이는 모두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 죽였다. 흔히 '홀로코스트' 라고도 불리우는 이 잔혹한 박해로 인하여 6,000,000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유다인들은 사실상 몰살되었다. 살아남은 유다인들은, 나치스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나치스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던 미국, 영국 또는 제3국으로 흩어져 이주한 소수 뿐이었다.


이 처절한 박해의 시기동안 유다인들은 자연스럽게 '선조들의 땅' 을 되찾아야 한다는 열망을 싹틔우게 된다. 옛 유다 지방 - 오늘날 '팔레스타인' 으로 불리는 - 에 유다 민족의 나라를 재건해야만 한다는 열망, 즉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본격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특유의 금전적인 능력, 경제력으로 영향력을 손에 쥔 미국, 영국 등지의 유다인들의 주도와, 중동 지방에 진출하여 지역 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던 그들 국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끝에 오늘날의 '이스라엘' 이 건국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비극의 서곡(序曲) 이었다. '디아스포라' 이후 2,000년에 걸친 세월동안 버려져 있었던 팔레스타인 땅에는, 아랍 민족이 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고, 터전을 일구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건국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이 땅에서 2천년에 이르는 세월에 걸쳐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이들이 나타나 '이곳은 먼 옛날 우리들의 약속의 땅이었으니, 너희들이 나가 주어야 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까지도 그들, '약속의 땅을 되찾으려는 이들' 과,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이들' 은 서로의 피로 피를 씻으며 증오에 찬 싸움을 벌이고 있다. 유다인들의 손에는 온갖 최첨단 무기와, 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지원이 있다. 그들의 포화와 총칼 아래 쓰러지는 아랍인들의 숫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유다인들 역시 무수히 죽어 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뿐, 그것은 엄연히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자살 폭탄 테러와 게릴라, 스스로의 고귀한 목숨마저 포기하면서 달려드는 처절한 공격에 오늘도 유다인들 중, 누군가의 부모이자 형제이며 친구인 누군가의 생명이 스러져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온갖 첨단 무기와 군사력을 동원하여 보복에 나설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결코 이미 떠나간 그들의 빈 자리, 슬픔의 자리를 대신 채워 주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도 그들은 말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나, 우리를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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