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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철 신부님께서 '주여당신종이...'를 만드신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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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분과 댓글 0건 조회 1,298회 작성일 2013-10-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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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신부님께서 '주여당신종이...'를 만드신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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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 쉬실 때
나는 넋을 잃고 어머니의 맥박을 꼭 쥔채 멈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곧 어머니의 숨과 맥박이 동시에 멈추고 입술이 새파래지셨다.
나는 어머니의 시신을 그대로 둔 채 재빨리연필과 오선지를 찾아 들고
언덕 위의 성당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 불러 드릴 성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른 형제들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울부짖는 동안
장남인 내가 시신 곁을 떠나 없어졌으니 난리가 났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은 나를 미쳤다고까지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누가, 왜, 그 순간 에 장례곡을 만들라고 성당으로 끌고 갔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그때까지 나는 감히 성가를 만든다는 것을 상상도 못해 봤다.
하여간 나는 성당에 올라가 성체 앞에 꿇어 앉아
눈물과 콧물을 한없이 흘리며 입당성가부터 마침성가 그리고 고별식 성가까지
장례미사곡 1세트를 두어 시간 만에 만들어냈고,
누나와 동생 둘과 함께 부를 4부 합창을 연습하여
장례미사 때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성가를 만들게 된 동기다.
그때 내 나이 27살이었고,
신학교에서 쫓겨나 여자중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굳게 믿었던 큰아들은 멀리 유학까지 가서 사제서품을 몇 달 앞두고
등산길에서 추락사하여 그곳에 묻혀 버렸고,
형을 대신하여 신부가 되겠다던 나 역시 신학교에서 쫓겨났으니,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 되자 어머니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는 종종 어머니 생각을 하다 보면 성모님 생각이 난다.
믿었던 외아들이 효도는커녕,
동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더니
설상가상으로 십자가에 발가벗긴 채 매달려 죽어 가는 꼴을 봐야 했던 그 성모님 말이다.

어머니는 평소처럼 주일 새벽미사에 참례하고자
우리집과 같은 담을 쓰는 언양성당으로 가시던 길이었다.
회갑을 갓 넘긴 어머니는 농사일하며 아이 열둘을 낳고 기르는 동안 온갖 병치레를 하느라,
팔순 노인처럼 늙고 유난히 허리가 꼬부라지셨다.
특히 두 아들의 비운에 속이 얼마나 상하셨던지 온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런 어머니가 차가운 겨울 아침, 성당을 오르는 계단에서 그만 넘어지셨다.
마침 성당에 오던 교우 한 분이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가 쉬시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정도 가지고 주일미사를 빠질 수는 없지요.” 하며
기어코 성당 안으로 들어가셨고
비틀거리며 예물봉헌을 마치고 돌아 나오다 두 번째로 또 넘어지셨다.

교우들이 놀라며 병원으로 가자고 권유했으나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미사에 빠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며
끝까지 참으셨던 어머니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나오는 길에 세 번째로 넘어지셨다.
즉시 의사를 불렀지만 이미 때를 놓치고 말았다.
의사는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다며 가방을 챙겨 떠났고
동네 교우들은 넋을 잃고 그저 ‘예수 마리아’를 외워 대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달려간 나는 이미 말문을 닫아 버리고 숨만 가쁘게 몰아 쉬는 어머니 품에 머리를 박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성당으로 달려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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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성가작곡을 여러 번 포기할 뻔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계기가 계속 이어져서
나는 그것이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내려 주시는 은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몇 개월 안된 어느 날,
우리 형제 중에서 제일 못생기고 병약하며 가장 바보스런 여동생이 수녀원에 간다고 나섰다.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여동생이 그나마 돌봐 드려야 할 상황이었고,
그보다 더 근심스런 일은 저렇게 못난 아이가 수녀원에 가면
필연코 몇 달이 안되어 쫓겨 올 게 틀림없는데 이걸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평소에도 여동생에게, “너는 안돼! 너처럼 병약한 아이는 수녀가 될 수 없어.”라며
여러번 만류했지만 바로 다음날 수녀원에 입회하러 간다니
이제 더 이상 말릴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여동생이 본당 신부님께 고별인사를 드리러 나간 사이,
동생 방에 들어가 하염없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났고 무엇보다도 저 못난 아이가
수녀원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쫓겨나면 어떡하나 싶어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그 불안은 곧 기도로 바뀌었다.

“주님, 당신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오니
제발 저 못난 아이를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몇 개월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에게도 기도해 달라고 울먹이며 부탁드렸다.
그러다 우연히 책상 아래로 눈이 갔다

휴지통에 깨알같은 글씨의 종이쪽지들이 찢겨져 있었다.

몇 개를 꺼내어 펴 보니
‘주여 당신 종이 여기 왔나이다. 하얀 소복 차려 여기 왔나이다.’라는 글귀였다.
불살라 버리려고 찢어둔 일기였다.
나는 갑자기 성가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겼고,
그 쪽지들을 차례로 배열해 두고 그 위에 곡을 붙였다.

동생을 주님께 맡기는 애절한 기도로 시작하여
수개월 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
그리고 두려움과 불확신으로 신학교에서 뛰쳐나온 뒤라
내가 못한 성스러운 성직을 동생이 대신하게 해 달라는
주님께의 호소가 함께 상승작용을 한 점이 유달랐다.

떠나는 날 아침,
악보를 동생의 봇짐에 끼워 주며 오빠의 기도가 담긴 노래이니 시간날 때마다,
또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불러 보라 권했다.

그런 뒤 한 달쯤 지나서 여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오빠, 첫날은 그 노래를 부르며 혼자 울었지만
다음날은 입회 동기생들이 모두 울었고
그 다음날은 온 수녀님들이 흐느꼈습니다.”라고.
나는 지금도 부지런히 살아가는 동생수녀를 보면서 이 성가의 은총이라 생각해 본다.
동생수녀를 보면 “버려진 돌이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라는 성서말씀이 떠오른다.

제일 못생기고 병약하며 가장 바보스럽던 아이가
어쩜 우리 형제 중에 제일 건강하고 똑똑하며 가장 활동적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앙의 신비’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 뒤 죄인과 불효자의 멍에를 벗기 위해 나는 수십 년을 몸부림쳤고,
사제가 되는 것이 유일한 효도방법이라는 걸 깨달았으며
피눈물 끝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비록 부모가 다 돌아가신 뒤였지만 천국에서 함께 기뻐하심을 믿을 수 있었다.
참 효도는 부모가 죽은 다음에야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적에 부친께서는 초대 본당신부로 오신
파리외방전교회소속 프랑스 선교사 신부님께 오르간을 배워 미사 때 반주를 하셨기에,
일찍부터 나는 오르간 장난에 익숙했다.
특히 미사 중에 오르간 옆에 붙어 서서 몰래 건반 하나를 꾹 누르는 장난을 많이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친의 큰 손이 내 몸뚱아리를 쳐 나는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래도 신명이 난 나는 또 몰래 살금살금 기어가
이번에는 아래쪽 건반을 응시하며 장난의 기회를 엿보기도 했다.
부친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매일 성당에 가서
오르간 연주와 성가 부르기를 가장 큰 낙으로 삼았고 그것이 곧 우리의 성체조배가 되었다.

지금도 오르간에 앉아 내가 부르고 싶은 성가 대여섯 곡을 부르는 것이
곧 나의 성체조배다.
참회와 자비의 성가를 먼저 부르고
감사와 성모찬송, 끝으로 순교자 찬가를 부르는 동안
저절로 흩어진 마음이 참하게 정리되고 깊은 신심으로 성당을 걸어 나오게 된다.
아마도 성가를 정성껏 부르고 뜻을 새기며 노랫말을 깊이 묵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종철 신부의 성가곡은 한결같이 슬픈 노래요,
눈물과 비탄의 성가”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어쩔 수없는 일이다.
성가작곡의 시작이 그랬고 또한 지금은 한 사제로서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의 벗이어야 하기에 앞으로도 나는 그런 성가를 만들고 싶다.
언젠가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지내는 날,
나는 그제야 기쁨과 환희, 찬양과 감사의 노래만 전문적으로 만들까 생각하고 있다.

*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4년 4월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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